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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아야할 독립투사 박열 영화 리뷰

by ssumad 2022. 3. 24.

1. 역사적배경

박열은 1902년 가난한 농민 박영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에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사범과로 전학해 수학 중 3.1운동관련되어 퇴학을 당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을 배달하면서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였습니다. 박열은 1920년에 최초의 무정부주의 단체 흑도회를 조직했으나 1년후 정치적 견해 차이로 김약수를 위시한 공산주의자가 이끄는 북성회와 박열의 아나키스트 흑우회로 분리됩니다. 이후 일시 귀국을 하여 조선최초 무정부주의인 혹로회를 조직합니다. 그 이후 1923년 4월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를 비롯한 여러 동지들과 함게 비밀결사 불령사를 조직 하였고 반일 활동을 더욱 적극으로 주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은 조선인에 대한 학살을 자행하였습니다. 이에 박열은 조선인 학살을 피해 기타 잇키에게 도움을 받아 피신하였으나 보호 검속이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었습니다. 일본 경찰에 의 취조 도중 박열의 폭탄 구매 계획이 알려지게 되었고 일본 정부와 검찰은 이것을 천황 암살을 꾀한 조직 사건으로 날조하고 과장하여 보도하였습니다. 그 이후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재판과정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둘 다 조선 옷을 입겠다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그래서 박열은 조선관료가 입었던 사모관대를 가네코 후미코는 치마저고리 차림을 하였습니다. 이 옷은 조지훈 시인의 아버지 조헌영이 제공해주었습니다. 둘 다 우리는 일본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므로 재판도 조선말로 할테니 통역을 허용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결국 두사람은 3월에 사형선고가 되었으나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습니다. 이 둘은 후세 다쓰지의 도움을 받아 옥중 결혼을 하였습니다. 

 

2. 줄거리

박열은 생계유지의 수단으로 인력거를 끌고 다니며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돈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개무시는 물론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기까지 합니다. 이런 박열이 개새끼라는 시를 쓴 것에 반한 가네코 후미코가 박열을 찾아가 동거를 제안합니다. 그렇게 둘은 동거를 하면서 서로 동료 또는 연인으로 발전해 나갑니다. 박열은 한국의 독립과 일본의 천황을 암살하기 위해 비밀결사대 불령사를 조직합니다. 그리고 암살에 성공하기 위한 폭탄을 제조를 하지만 실패하고 맙니다. 불령사라는 조직은 한국인이 운영하지만 일본 앞잡이를 하는 사람들이나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찾아가 보복하기도 합니다. 그 이후 일본의 관동이라는 지방에서 대지진이 발생합니다. 이에 일본정부는 지진에 대한 민중들의 관심을 돌리기위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고 다닌다는 소문을 퍼트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분노한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살해된 조선인 수는 6천여 명이었습니다. 모든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을 피해 도망 다닐 때 박열은 오히려 감옥이 더 안전할 거라며 일부러 감옥으로 들어갑니다. 일본인들이 감옥에 있는 박열을 죽이려고 했지만 일본경찰이 막아줍니다. 박열을 시작으로 다른 불령사 조직원들도 감옥에 자진해서 들어갑니다. 박열은 감옥에서도 주눅들지 않았습니다. 그 중 고문을 견디지 못한 조직원이 박열이 폭탄을 입수하려고 했다고 자백합니다. 다행히 다른 조직원들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고 박열의 이름만 말한지라 박열이 모든 걸 안고 가기로 결심합니다. 후미코는 박열이 재판을 시작되기 전에 이미 사형당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혼인신고까지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시신은 가족이 수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재판 결과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일본정부는 천황의 이름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에 줍니다. 후미코와 박열은 각각 다른 형무소로 이송이 되고 이후 박열으 찾아온 변호사 후세에게 후미코의 얘기를 전해듣게 된 박열은 후미코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사인규명도 사체인 부검 의사도 거부당한채 후미코를 조선 땅에 묻어 달라는 박열의 부탁으로 조직원들은 후미코의 시신을 찾아 묻어줍니다. 얼마 후에 박열과 후미코 사진이 나돌게 되고 일본은 이를 기사화 시켰습니다. 박열은 22년 2개월을 복역하고 석방되게 됩니다.

 

3. 총평

영화 박열은 1919년 3.1운동 당시 고등학생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탄압에 강한 분노를 느끼고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인 동경으로 넘어가 적극적으로 투쟁했던 한 청년의 일생을 엿볼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물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유명하신 분들도 많이 있지만 이렇게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독립투사분들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학창시절 한국근현대사에서 배웠던 내용 관동대지진이라는 사건이 있었는데 일본이 민란의 조짐을 사전에 막기 위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타고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서 이를 계기로 무고한 조선인 6천여 명이 학살당하는 간토대학살을 영화에서는 잔인하게 연출되지는 않았지만 그때 당시를 생각해보면 정말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리고 극중 인물 가네키 후미코 이 여성은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일본인 이었지만 조선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에 감동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재판장에서 조선전통의 의상을 입고 재판을 받은 것은 물론 자신의 죽은 뒤에도 조선땅에 묻히길 원한다는 말을 직접했었습니다. 그리고 재판장에서의 박열은 일제 억압받는 조선인 백성이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떳떳하게 임하는 모습을 보고 저런 자신감과 용기는 꼭 본받고 싶고 존경합니다. 그리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신분들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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